이 남자의 오늘

[2009.1.9] 오래간만에 잉크를 다 쓴 펜 - 미츠비시 Uniball eye

오늘의 알라딘 2024. 3. 4. 13:13

요새같이 필기구가 풍족한 시절이 없었다. 

국민학교 3학년에 처음으로 소유해 본 샤프펜슬-그것도 아버지가 샘 많은 동생 몰래 사주신-을 며칠이고 만지작 거리던 그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 것을 보면 요즘의 학생들은  정말 풍요하다. 지천에 깔린 것이 볼펜이며 샤프펜슬이니 어디 하나 잃어버려도 그리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고가인 몽블랑 펜을 제외하고는 진득하게 사용해 본 필기구가 없다.

헤어져서 못 입는 옷이 없듯, 잉크나 연필심이 다 닳아서 수명을 다하는 필기구를 보기 힘들다.

요즘 사무실 직원들이 유행처럼 애용하는 수성펜이 있다. 필기구 메이커로는 다소 생경스런 미츠비시의 Uniball eye라는 제품이다. Waterproof라고 쓰여있으니 실제로는 유성펜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의 국내 홈 페이지(http://www.uniball.co.kr/)에도 수성펜으로 올려져 있으니 그렇게 부르자.

 

UNI - MITSUBISHI PENCIL

 

www.uniball.co.kr

 

처음엔 약간 날카로운 필기감이 있지만 조금 길이 들면 여간한 만년필이상으로 부드럽고, 실제 만년필로 작성된 문서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산출물을 얻을 수 있어서 제법 부서원들에게 인기가 있다. 물론 회사에서 대량으로 사놓은 것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

오늘 그 중 빨간색 펜 하나를 거의 6개월 만에 잉크를 모두 사용했다. 그동안에 잃어버릴 고비가 몇 번 있었지만 실로 오래간만에 대중적인 펜 하나를 온전히 사용한 셈이다. 그것도 빨간색 펜을^^  (물론 따로 애용하는 몽블랑 볼펜의 잉크를 몇 차례 리필한 것은 조금 예외로 치면 말이다.)

암튼 비싼 펜은 아니지만 여러 달 동안 정든 펜을 아쉽게 보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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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3.4.

 

어려서부터 제법 글씨를 잘 썼다. 국민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상만규 선생님-성함을 기억하는 몇 중에 한 분이다-의 책상 바로 앞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굳이 훔쳐보려 하지 않아도 고객만 들면 늘 그분의 글씨가 가득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특별활동으로 붓글씨도 했었으니 아무래도 선생님은 그쪽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나보다.

 

파커 만년필로 출석부며 성적표 같은 것을 인쇄한 듯 적었던 분인데 누군가의 글씨를 따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때였다. 가끔씩 튜브를 눌러 잉크를 주입하는 모습은 어린 내게 언감생심 로망이 되었다.

 

그 후로 중학교에 들어가고 선생님을 흉내내듯 만년필을 사용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르렀다. 굵은 촉에 서걱거리는 긁힘을 따라 번지는 잉크가 내 글씨가 되었을 때 아직도 국민학교 6학년 그 시절이 편린이 되어 노트를 통해 되살아 난다.

 

잉크를 다 써서가 아니라 하도 쓰질 않아 말라버려 가끔 만년필의 잉크를 채운다. 이제 손으로는 한 달에 한 페이지를 쓸 일이 없으니 마치 의식을 행하듯 그리하고 있다. 

무엇으로 쓸까보단 무엇을 쓸까 가 늘 고민이었던 차였는데 이젠 눈도 다 녹아가는 계절에 눈 한송이를 이고 서랍 안에 누운 몽블랑의 정수리가 갑자기 애잔하다.

 

오늘도 그 의식을 해 줘야하려나 보다.

 

잉크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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