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7.10을 추억하며] 만남 - 기다림에 대한 보상
사랑하는 딸 하은에게.
솔직히 네 엄마는 조금 엄살장이이다. 조금만 아파도 참지 못하는 성격 덕에 큰 병을 만들지 않는 좋은 점도 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네게 도움이 될 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선뜻 제왕절개를 통해 너와의 만남을 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네 엄마의 배에 훈장을 남겨버려 무척 속이 상한 결정이기는 했지만 혹시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무슨 잘못이라도 생길 까 걱정이 되었던 아빠로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벌써 여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더웠던 7월의 10일.
네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고공낙하를 눈앞에 둔 병사의 급박함처럼 그리 기다릴 시간 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간단히 침구를 챙겨 병원에 들어 선 후 네 엄마가 수술실로 올라가기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데 미리 머리까지 감고 준비한 네 엄마를 보면 의외로 침착한 것 같더라.
우습게도 정작 네가 수술을 통해 세상구경을 하고 있는 동안 아빠는 병원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수술보증금을 준비하라는 간호사의 말을 너무 순진히 믿은 나머지 빈 손으로 병원을 찾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은행 현금출금기를 전전하면서 돈을 마련하고 있었단다. 정말 땀을 뻘뻘흘리며 수술실 앞에 당도해 보니 벌써 어느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출산 당시까지 성별을 아들처럼 모호하게 알려둔 덕분에 울음소리로 봐서는 실망(?)스럽게도 정말 사내 아이거나 다른 산모의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양진님 보호자분~"하는 간호사의 기계적인 멘트 덕택에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너라는 것을 알았다. 할렐루야!
3.6킬로그램이란다.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아빠는 네가 태어난 몸무게의 겨우 절반만한 크기에 태어났다고하니 너는 정말 건강히 태어난 셈이다. 솔직히 너를 처음 받아 안고는 제일 먼저 손가락, 발가락이 잘 있나 부터 확인했다. 임신초기에 먹은 약 때문에 내내 걱정이 많았던 네 엄마 덕택에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았지만 나 역시 속으로 염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난 갓난쟁이와 분유 한 통, 기저귀 한봉지를 아빠에게 넘겨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는 병원의 황당한 정책 때문에 아빠는 처음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보리차로 시작한 이 세상에서의 첫 음료주기부터 시작해서 첫 기저귀 갈기같은 네가 시작한 모든 '처음'의 것들에 이 아빠가 함께 했고 무사히 해 냈음을 지금도 참 다행으로 여긴다.
병실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깔고 너와 보낸 첫 밤을 이 아빠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침대는 네 엄마가 수술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단다) 한주먹이 조금 넘어보이는 작은 몸을 혹시라도 잠결에 누르지나 않을 까 노심초사하기도 했지만 시간 간격으로 울어대는 덕택에 하루저녁이 참 빨리도 지나가더군. 희한한 것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출근했는데도 조금도 피곤치 않더라. 아마도 자식 앞에서 보이는 초자연적인 힘이 이 부족한 아빠에게도 있나보다.
오래동안 기다림과 함께하는 만남은 그 의미가 클 것이다. 만남이라는 것이 결국엔 이별을 만들에 내는 것이라 큰 의미를 부여치 않으려 애쓰는 것이 요즘의 세태라지만 만남과 이별함에 익숙치 않은 아빠에게는, 그것도 갖은 산고(産苦)-대부분이 네 엄마의 산고이지만- 끝의 만남은 그토록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기다림 자체의 아름다움이 더 소중할 것이고 만남을 위한 준비과정 역시 소중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만남'이 약속되었기에 의미가 부여되고 있을 터이니 결국은 너를 위한 세월의 다독거림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얇은 벽 하나를 경계로 열 달을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사랑하며 지루히 보냈던 그 처절한 기다림의 끝은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소중한 생명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돌아왔고 지금 그것을 누리는 행복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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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11.9.
2005년 정도에 쓴 글일테지.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때의 기억이 온전하다.
사람이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비로운 경험. 생로병사가 따지면 다 그렇겠지만 그중 태어나고 만남에 대부분의 가치를 더 두기 마련이다.
이젠 세월이 지났다. '생'보다는 '로병사'- 늙고 아프고 죽음에 다다를 시간 쪽으로 인생의 무게추가 하루씩 옮겨간다.
그래서 매일의 만남이 더 소중한 아침. 오늘도 그렇게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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