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지루함을 추억하며] 십 년 같은 열 달의 기다림
사랑하는 딸 하은에게.
기다림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열 달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다행히 아빠는 네 엄마 덕택에 기다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있는 사람이다. 연애시절 네 엄마는 약속시간에 제대로 맞추어 나온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지각대장이었다. 네 엄마를 더 빨리 만날 생각으로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가 기다렸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의 애간장을 녹여놀 생각으로 일부러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요새도 그 버릇이 남아서 네 엄마가 다 좋지만 이것은 하나 고쳐야 할 것 같다.ㅎ 아무튼 기다리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고 끈기와 참을성을 미덕으로 알았던 아빠에게도 너와 함께한 열 달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의 친구이기도 한 주명이 이모의 경우 결혼은 늦게 했지만 벌써 아이를 낳았는데 남의 일이라 그런지 정말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낳은 것 같다고 느낄 정도이다. 남들이 군대에 입대하네 임신하였네 하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대를 하고 아이를 낳는 걸 보면 세상의 시간은 자기 것 과 남의 것이 따로 인 것 같다. 한편으론 군생활도 6개월로 끝내버린 아빠로서는 열 달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아홉 달 정도의 시간이지만 (실질적인 임신기간이 9개월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처음 한 두 달은 정말 끔찍이도 긴 시간이었다. 특히 네 엄마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다. 게다가 너와 함께 온 입덧이라는 놈은 네 엄마를 물과 과일 몇 조각 이외에는 먹지 못하게 하더니 급기야 병원신세를 지게 했다. 심지어 음식 냄새조자 맡지 못할 지경이 되자 아빠는 음식을 얻어먹기는커녕 엄마가 잠든 틈을 타 몰래 라면을 끓여 먹다 냄새에 잠을 깬 네 엄마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었다.
집안 한켠에 너를 위한 방이 생겨나고 네 사물함이 생기더니 거기에 하나 둘 널 위해 준비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보다 좋고 예쁜 물건들로 하나하나 준비하는 네 엄마의 손길은 나중에라도 꼭 감사드려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백컨데 잠시동안 (거의 태어날 때까지도 어느 정도) 네가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모두가 다 우리나라 초음파기기의 부정확성에서 기인된 사건이었지만 재미난 해프닝이었음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니던 산부인과는 '양경희산부인과'라는 곳이다. 적어도 네게는 좋은 것을 고집하는 네 엄마는 깨끗하고 좋다는 추천을 받아 처음부터 그 병원을 이용했는데 이곳은 어느 정도 개월 수가 지나면 당시엔 철저히 불법이었던 태아의 성별을 은근히 알려주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문제는 네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임신 4개월 정도 되었을 때 엄마 아빠가 서둘러 확인(?)을 요구하게 되었고 병원에서는 아들 같다는 말을 듣게 되었단다. 몇 달 후에는 처음과 달리 딸 같다는 말을 듣게 되어 무척 혼돈스러웠지만 이 역시 지금 생각해 보면 딸인 경우 중도에 사산시키는 악습을 막고자 병원에서 생각해 낸 지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단다. 어쨌든 잠시동안 아들인 줄 알고 출산용품을 준비하다가 나중엔 남녀 구별 없이 입힐 만한 옷가지로 고르는 등 재미난 혼동을 오히려 즐기던 시기였다.
분명히 그리고 결단코 말하는데 아빠는 네가 딸로 태어난 것이 대한 추호의 미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하단다. 이 세상은 분명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불평등할 뿐 아니라 모순된 일을 자주 만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많은 부모들은 이런 이유에서 자기 자식만은 아들로서 불편함 없는 생활을 누리도록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들은 소위 대(代)를 잇는 수단으로 아들을 이용하고 있다지만 21세기엔 너무도 구닥다리 생각이지 싶다.
요새 너에게 읽어주고 있는 백설공주라는 동화의 백설공주의 친어머니는 백설공주를 갖기 위해 몹시도 하나님께 소원했다고 적혀있다. 엄마 아빠가 보낸 열 달의 기다림은 비단 백설공주 어머니의 그것과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네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이로 우리 곁에 오기까지 노심초사 걱정했던 네 엄마의 정성은 곁에서 지켜본 아빠가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크다. 달을 넘기며 점점 불러오는 배를 제법 그럴듯하게 어루 안은 네 엄마를 보면 이제 제법 임신부의 티가 난다. 남들도 그럴까 싶지만 남산만 한 배를 한 네 엄마가 이제껏 보아온 여느 임부보다 아름답다. 어느 임신부가 저렇게 예쁠 수 있을까 싶다. 너를 갖고부터는 오히려 더 어려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 어느 택시기사는 배부른 네 엄마를 보고 너무 어리게 보여 몇 살이냐고 되묻기까지도 했다고 한다. 이 역시 널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네 엄마의 얼굴에도 환한 생기로 솟아오른 것 같다.
가끔씩 힘찬 발길질 덕에 엄마 배의 한 쪽이 굳어지며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얼굴이구나. 가끔 고래고래 엄마 배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잠재의식 저 심연에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초여름 무더위를 네 기다림으로 보낸 97년의 그날들은 여전히 행복한 기억이다.

[글 더하기]
오늘은 2023.11.10.
어제까지만 해도 윗글에는 '글 더하기'를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딸아이가 태어난 97년 여름을 거꾸로 거스른 열 달의 지루한 시기가 글을 읽는 내내 새록새록해서 첨언이 불필요했다.
하지만 지루함의 끝은 미친듯한 빠름일까?
블랙홀 반대편 웜홀의 끝에 화이트홀이 존재한다.
97년 여름이후의 시간은 그 이전보다 두세 배 빠르게 작동한다.
나는 그대로 인것 같은데 아이는 벌써 저만큼 앞서 커 있고 깜짝 놀라 거울을 보면 역시나 그만큼 늙어있다.
아이와의 행복, 양육의 보람 이면에는 시간을 저 멀리 날려버리는 부스터가 함께 달려있다.
아이는 내 품안에서는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내년이면 자신만의 궤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이젠 일정한 주기의 우연함에 따라서 가끔씩 해후하는 다시금 지루함의 시간으로 접어들겠지.
그래도 여전히 ‘별은 내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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