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오늘

[2009.10.28] 기계의 노예가 되지 말자 - 지난 밤의 헛 짓을 바탕으로

오늘의 알라딘 2024. 10. 29. 09:02

어제 저녁에는 몇 년 전 미국 출장을 함께 갔던 업계 교육담당자들과 저녁 약속이 여의도에서 있었다. 오래간만의 모임이라 늦지 않으려고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이 있는 '종각역'에서 '여의도역'까지는 보통 종로 3가역에서 5호선을 갈아타고 가는 것이 보통인데, 어제는 하도 오래간만의 여의도행이라 그런지 도무지 동선이 그려지지 않았다. 종각역 벽에도 전체 노선도를 찾을 수가 없어서 PDA폰에 내장된 지하철 노선도를 열었다.

사용 중인 프로그램은 'Pocket Subway'란 것인데 이럴 땐 무척 유용하다. 단순히 지하철 노선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역의 출구정보, 주변 시설물, 연계 교통편, 운행 시간표 등 제법 쓸만한 정보가 많다. 이왕 프로그램을 연 김에 종각역에서 여의도역까지의 최단 노선을 검색해 봤다. 보통 내가 다니던 길과는 달리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 가서 '충정로역'에서 5호선을 한 번 더갈아타라는 안내였다. 두 번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노선도를 보니 단 일곱 정거장으로 정말 가까워 보였다.

'그래 새로운 길로도 가보는거야!'

두 번을 갈아타는 동안 생각보다 많이 걸었다. -약간 후회...... 특히 5호선을 갈아탈 때는 땅 속 몇 층을 더 내려가느라 정신이 다 혼미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단이 일어났다.

겨우 5호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상일동행 지하철이 '날 알아보고' 딱 맞춰 들어 오고 있었는데 PDA 화면에도 분명히 '5호선(상일동)'이라고 나와 있어서 추호의 고민이나 의심없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 막 시작된 시간에 다행히 빈 자리까지 있어서 오늘의 운수가 제법 좋다고 쾌재를 부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몇 정거장이 지났을까? 귀에 익숙한 역명의 안내가 나온다. "종로 3가, 종로 3가역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종각역을 출발해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얼마나 왔는데 아직도 종로라니??? 게다가 종로 3가라면 도리어 여의도에서 더 멀어진거 아닌가?

그제서야 5호선을 갈아타면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는 걸 알아차렸다. 5호선 '상일동행'이 아니라 '방화행'을 탔어야하는데 멍청한 PDA만 믿고 아무 생각없이 잡아탄 것이 문제였다.


기계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이 직접 '생각'이나 '판단'에 참여하는 몫이 점차 작아지고 있다. 

뭐든 단추 몇 개로 입력을 하면 결과치는 알아서 쏟아져 나오는게-어제 처럼 엉터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이다. 번잡한 입력마저도 귀찮다면 돈으로 대신 시키면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특히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산기를 붙잡고 쓴 다음부터는 '사칙연산'을 내 손으로 직접 해 볼 일이 거의 없다. 그 중 나눗셈 같은 경우엔 그 기본적인 logic 조차도 헛갈린다. 구구단도 가물한 건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고. 잠깐씩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의 수학을 봐주고 있는데 얼마전 다루었던 '소수 ÷ 소수'의 경우에는 소숫점의 이동이나 몫과 나머지를 구별할 자릿수 계산 등은 아이예 미리 예습하지 않았으면 지도가 불가능한 별나라 계산법이었다.

편리한 것이 늘 사람을 이롭게하는 법은 아닌가 보다.  

억지로라도 불편하게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써야 미련한 '공룡'을 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 지금은 '지적 知的 빙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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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0.29.

 

본문으로부터 정확히 15년이 지났다. 스마트폰은 더 발전했고 실시간으로 노선표를 내려받는 지하철 엡에선 더이상 저 따위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우려대로 억지로 머리를 쓰는 일은 더 줄어들었다. 알고 이해하는 것을 말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검색에 나온 그대로가 진리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각자 다른 경로로 검색한 내용이 서로 다를 때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검색값이 다를 때 언쟁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기계의 노예가 되지 말자 했는데 그 종속성은 그 어느 때 보다 강하다. 스마트폰 없이는 이재 차 문도 못열고  금융거래도 못하며 어딜 찾아가지도 못한다. 세차하는 길일을 정하는데도 당연히 날씨무당의 말을 들어봐야하고 화장지 한 두루마리를 사더라도 가격비교 조언을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어학 공부는 물론이고 지루한 출퇴근시 노래나 뉴스로 귀를 호강시켜 주는 것도 다 이 쪽이다.

 

그러니 이젠 좀 생각을 바꿔야 할 때인가 보다. 노예로의 자리매김을 떠나 나의 필요 대부분을 채워주는 동반자 관계가 확실하니 반려폰이라 부르는게 맞겠다. 아님 내가 스마트폰 쪽의 반려인이거나.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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