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싫어한다는 남자들의 대화는 첫째가 군대 얘기, 둘째가 축구 얘기라고 했다.
사실이다. 남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지겹지도 않은지 그 무수한 '군대' 레퍼토리가 끊어지는 법이 없다. 심지어 나 같은 '방위' 출신도.
하긴 같은 군 생활이라 해도 육해공군이 다르며 병과가 천차만별이고 상관과 부하로 이어지는 무수한 수열 조합의 일상을 3년 동안 반복했으니 천일야화 못지않은 스토리가 창궐하는 건 말 밥이요 당근이 되겠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군대 얘기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의향이 있냐고 남자들에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혀를 무는 일'을 택할 사람이 대부분일 것을 장담한다. 이렇듯 시켜도 다시는 못할 일이 있는 법이다.
오늘은 우리 회사의 내년도 대졸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 전형에 면접위원으로 참여했다. 삼성그룹의 경우 소정의 자격 조건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SSAT라고 불리는 필기 적성 검사를 보게 하고 이를 통과한 지원자에 한해서 집단 토론 면접, 프레젠테이션을 통한 전문성 면접, 임원 면접 등으로 3단계 면접을 실시하는데 그중 '집단 토론 면접'의 면접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매 년 이맘때면 한 번씩 참여해서 느끼는 일이지만, 특히 올 해 유난한 취업시장의 한파를 느낀다. 오늘 면접만을 보면 서울대,고대,연대-소위 SKY 출신 지원자가 90%에 육박하는 데다 해외대 출신도 너댓이 섞여 있었다. 말 그대로 명문대 브레인들이 발로 차이는 현실에서 자신의 의견을 한 마디라도 더 피력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귀한 남의 집 자식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본다. 딸아이를 키우는 아비의 마음 때문일까? 갑자기 스산해진 날씨에 흔들리는 남자의 심약함일까?
혹시 누군가 나에게 이젠 기억도 흐릿한 15년 전으로 돌아가 저들 틈에서 다시 면접을 보라 한다면 어떨까? 저 앞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학벌도 안되지만 과연 저렇게 치열하게 열변을 토해낼 자신이 내게 있었던가?
이젠 정말 누가 시켜도 다시는 못할 것 같은 일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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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0.4.
글을 썼던 날로부터 15년을 더 다니고 있으니 올해로 근속 30주년이 되었다. 다시 말해 다른 회사 기웃거리며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는 일 같은 '다시 못할 일'을 그간 안 하고 살았다는 말이라 다행이다. 대신 저런 식의 면접위원의 자리에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참여해야만 했다. 사진 속 후배 중 한 명은 아예 인사임원이 되어 면접관이 직업이 되어 버린 경우가 되었다.
남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어떤 처지가 되고 나면 그 위치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경험해 보면 안다. 내가 면접해 채용했던 친구들이 나중에 내 주위 부서원으로 발령되거나 심지어 내 팀의 팀원이 된 경우가 있었다. 다시 봐야 하는 사이가 된 것. 어떻게 기억하는지 몰라도 내가 면접관이었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어서 그 후로도 가끔씩 뽑아줘서 감사인사를 들어야 했다. 다행히 일 잘하는 친구면 나름 뿌듯함이 있지만 적응 못하고 힘들어하거나 얼마 되지 않아 퇴직하는 경우를 보게 되면 회사와 당사자에게 뭔가 못할 짓을 실수라도 한 기분이라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내가 면접을 당하는 일도 자주 할 일은 아니지만 남을 면접해 좌지우지하는 일 역시 그리 자주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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