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초기 소설이자 일명 <쥐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을 쫓는 모험'을 마저 읽었다.
'양을 쫓는 모험'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하 바람)', '1973년의 핀볼(이하 핀볼)'에 이은 작품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나'와 친구 '쥐'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전편인 '바람'과 '핀볼'이 자전적인 일기체 형태의 생활 속 이야기라면 '양을 쫓는 모험'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소설다운, 그 다운 스토리가 시작된다. 앞의 두 권과 '양을 쫓는 모험'의 문체가 좀 상이하다. 또 쥐와 나누는 대화의 화법 역시 조금 낯설지만 이는 번역자가 바뀌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이번에도 등장하는 술집주인 'J'. 그리고 이야기의 카메오로 혹은 흐름을 풀어 가는 열쇠의 역할로 '낯선' 여자들이 여전히 등장한다. '바람'에서는 손가락이 네 개인 여자, '핀볼'에서는 '나'와 침대를 함께 쓰는 쌍둥이 자매, 그리고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귀耳 모델을 하는 콜걸. 모두 다 왜 그쯤에 그녀들이 등장해야 했는지 이유도 없고 역시 이유 없이 책 속에서 사라진다. '1Q84'에서 매주 주인공을 찾아오던 유부녀 여자친구와 같이. 그가 좋아하는 표현인 '상실'의 샘플일까?
그런 면에서 '양을 쫓는 모험'은 그의 최근 소설인 '1Q84'와 여러 가지로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는 비슷한 전개 방식, 느낌이 비슷한 등장인물들, 양념으로 들어가는 음악과 책 이야기들, 돌연한 인물들의 출현-특히 이 부분에 대한 독자에 대한 양해가 전혀 없다. 갑자기 나타나게 되는 낯 선 사람을 독자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러다가도 책의 마무리 시점에서는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해 버리는 지나치게 성급해 보이는 엉성한 결말.
이런 것들을 '하루키式'이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면에선 너무 쉽게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큰 축에서의 스토리라인과 독자들에게 어필할만한 등장인물과 소재의 수집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 말이다. '양을 쫓는 모험'의 보완판이라고 하는 '댄스 댄스 댄스'를 마저 읽는다면 위의 심증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 하지만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그의 '스타일' 때문에 매력적이다. 통속과 현대적 가치의 정점에 서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일본풍 만화의 한 대목처럼 밑도 끝도 없는 몽환적 혼돈에 빠뜨린다.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어'라고 까지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소설 그 자체로서의 벽을 치는 그의 글재주를 쉬 폄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의문 두 가지. 도대체 왜 소설의 화두는 '양'이었을까? 결국엔 그것이 '소'였거나 아님 '고양이'였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을.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내내 유일한 매력적 히로인 캐릭터였던 '귀耳 모델의 콜걸'은 도대체 어디로 '상실'된 것일까?
손가락이 네 개인 여자, 쌍둥이 자매, 유부녀 여자친구가 차례로 책에서 퇴장할 동안에도 이렇게 아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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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0.7.
그의 글이 또 읽고 싶어 지는 가을이 찾아왔다. 그의 글은 유난히 가을에 더욱 어울린다. 과식을 했을 때처럼 다 읽고 나면 묘한 불쾌감이 남는 특징이 있음에도 과식의 원인이 된 음식을 끊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몽환적. 이제까지 정의한 그의 글을 대변하는 나만의 느낌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토막들을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엉뚱한 인물과-가끔은 동물-그로 인한 비현실적 세계로 이어 붙여 넣음으로써 잠에서 깨기 직전 혹은 직후에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느낌을 독자에게 받게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유난히 자면서 꿈을 많이 꾸는 내게는 굳이 잠자리에 눕지 않고서도 그 묘한 반각성의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미약과 같은 글들이다.
명쾌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훈이 선명하지도 않고 등장인물들마저 모호한 깔끔하지 않은 뒷맛이 그의 글만의 매력이다.
평양냉면 같은 양반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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