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딸아이 여름방학 숙제 때문에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방학기간 중 음악회를 다녀오고 그 소감을 적어내는 것인데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아 부랴부랴 어제 날을 잡은 것이다.
다행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주말마다 이어지는 중이라 3층 난간 앞자리이긴 했으나 저렴한 비용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서곡, 생상의 첼로 협주곡 1번, 베토벤의 5번 운명 교향곡 같이 귀에 익은 곡을 피아니스트 조재진의 해설과 함께 들을 수 있었던 기회라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적은 청소년들에게는 좋은 공연이었다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어제 객석을 가득 채운 꼬맹이들 중 자발적 관람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며 첼로며 배워왔고 오디오파일인 아빠 덕에 클래식 듣는 고통(?)에 꽤나 익숙한 딸아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겠지만, 다들 숙제 때문이거나 극성스러운 부모 손에 이끌려 동원(?)된 아이들이다 보니 공연 중에도 이건 어디 커피숍에 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공연에는 무심한 아이들 뿐이다. 뭐든 억지로 하는 것에 즐거울 턱이 없는 법이다.
몇 번을 당부한 덕택에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아이는 없었지만 온몸을 꽈리를 틀어가며 고문을 이겨내거나 아예 옆에 아이랑 수다 떠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녀석들 때문에 나 역시 두 시간이 힘들었다.
뭐 이런 식으로라도 난생 처음 예술의 전당 객석을 경험하게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으나 아이들에게 클래식을 접하게 하는 방법이 꼭 이런 식의 숙제에 의한 동원일 필요도 없고, 클래식이 어쩌다 한 번 듣고 감동을 받을 그런 장르의 예술도 아니고, 클래식을 꼭 들어야만 문화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교육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CD 몇 장을 사서 집에서 듣게 하거나 일상에선 접하기 어려운 국악공연을 경험하게 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아니며 유명 배우가 등장하는 뮤지컬 한 편을 보게 하는 편이 백 배는 낫다. 그런데도 음악감상 숙제는 무조건 '클래식 공연 감상' 이런 식으로 못 박는 선생님이나 학부모 모두 무척이나 전 근대적이다. 마지못해 참석한 아이들에게도, 또 좋은 공연을 기대하고 간 선량한(?) 관객들 모두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취향대로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좋아하는 장르를 찾아보게 하고 즐기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K-POP 가수의 공연이면 또 얼마나 흥겨울 것인가?^^ - 요즘 싸이 공연이면 아주 최고겠지.
아무튼 앞으로 제목에 '청소년'이 붙은 공연은 다시는 찾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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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5.6.27.
하긴 그런 숙제라도 아니면 자발적으로 클래식 공연을 찾아볼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숙제란 것이 원래 하기 싫고 억지로 미션을 해야 하는 것에 숙제로서 의미도 있는 것이라 한편 이해도 된다. 하지만 늘 자발성이 없는 것이 문제다. 내심 그 한 번의 관람을 통해서 회심을 해 클래식 애호가가 되길 바라는 숨의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십중팔구는 오히려 클래식에 멀어지게 한다. 억지로 하는 모든 것들은 대개 트라우마가 되어 다시는 그쪽으로 발길도 안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좁은 객석에 엄마 손에 이끌려 두 시간 남짓 기괴한 사운드를 강제로 들으며 꼼짝 못 하는 수감생활을 당하고 나면 보통을 고개를 젓게 만드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방학 숙제는 다양한 문화체험활동 중에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좋은 경험을 남기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클래식은 나중에 오디오쟁이가 되면 자동(?)으로 좋아진다. 조바심은 필요 없다. 다들 필요가 수요를 낳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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