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어버이날이었다.
어느새 노인축에 끼어버리신 양가 부모님들과 저녁 한 끼 같이하는 것은 챙기려고는 하지만 정작 내가 어버이인 것은 잊고 살았다. 아직은 이런 '날'을 챙겨 먹기엔 스스로가 멋쩍은 이유도 있겠지만, 외할머니와의 저녁식사 후 집에 돌아가 보여줄 것이 있다는 비장한 얼굴의 딸아이를 보고서야 오늘이 '어버이날'인 것을 알았다.
사실 딸아이 얼글을 오래간만에 보는 것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통에 저녁에 늦게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거의 이틀 만에 만나는 경우가 보통인데 어제가 그랬다.
보여줄 것이라고 해봐야, 학교 수업시간에 몇 자 끄적거렸을 '엄마, 아빠께로 시작하는' 편지 한 장이거나 색종이로 얼기설기 엮어만든 카네이션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순서에 따라 1페이지에 위치하고 있는 편지와 부모님을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를 시작으로 심부름 쿠폰집, 축하카드가 제법 규모 있게 꾸며진 책자(?)를 선물했다. 역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시켜서 한 것이겠지만 카네이션 한 송이보다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컴퓨터를 켜서 김창완의 '어머니가 참 좋다'를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고 무용자세를 취한다.
장에 가신 어머니를 찾다 길을 잃었지
파출소에 혼자 앉아 울다 어머니를 보았지
나를 찾은 어머니는 나를 때리면서
어디갔었니 이 자식이 속 좀 엔간히 태워라
나는 참 좋다
때리는 어머니가 참 좋다
어머니의 눈물이 참 좋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다
앞서가는 어머니를 보고 나는 울었지
나 없으면 엄마는 순전히 껍데기인 거냐고
화가 났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 알맹이야 이제 속 좀 엔간히 쌕여라
나는 참 좋다
어머니의 웃음이 참 좋다
어머니의 미소가 참 좋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다
뭐 율동이라고 해 봐야 나와 아내를 그대로 전수받아서 몸치에다 통나무 저리 가라지만, 한참 연습했을 딸아이의 율동을 보면서 아내 역시 표현 못할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선생님의 숙제로 했겠지만 시킨다고 꼬박 다 하는 딸아이의 '순수한' 백만 불짜리 공연에 모처럼 행복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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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8.
옮겨오던 과거의 글이 2008년 4월에서 5월로 넘어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5월은 늘 분주하다. 내 생일을 포함해 가족행사가 연이어 있다 보니 때론 부모에서 때론 자식의 입장으로 다중인격을 경험하기도 한다.
2008년의 블로그엔 동영상까지 담았었는데 오늘은 참았다. 직관한 딸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사적' 댄스는 이제 NAS에나 남겨 둔 비밀의 것이 되었다.
이젠 하루 한번 얼굴보기도 쉽지 않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얼마 후 정말 다른 차원의 벽 너머로 건너가기까지 그리 얼마 남지도 않았네.
요즘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게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을 쭈욱 늘어놓고 하나씩 퀘스트를 깨 나갈 때마다 도장을 받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게임 같다. 물론 중간중간 실패 하거나 건너뛰게 되는 것도 사람마다 있겠지만 어느덧 준비된 게임시간 끝은 끝판왕 그 어디쯤에 비슷하게 만나게 되는 뭐 그런.
그래서 가끔. 과연 누구를 위한 롤 플레이를 하며 살고 있는 건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어차피 충전된 게임시간이 끝나면 다들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니 말이다.
모두들 몇 번째 판을 깨고 계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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