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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오늘

[2009.10.22.] 한 밤의 압구정 외출 스케치

by 오늘의 알라딘 2024. 10. 17.

이른 감이 있지만 초등학교 6학년의 딸아이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것일까?  '첼로'를 전공하겠다는 결심으로 예술고 선생님에게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밤 9시가 넘어 동호대교를 건너 학원이 있는 압구정동에 도착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집에서 이곳까지의 기사 노릇에다 첼로 포터 역할 뿐이지만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해야 하는 이 노릇을 피차 잘 해낼 수 있을지 지레 걱정이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읽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을 펴 들고 레슨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한밤중에 자동차 실내등을 켜놓고 FM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배경으로 책장을 넘겨가는 것도 이러고 보니 제법 멋스럽다. (하지만 한 겨울이나 한 여름엔 어떡하지?)

그런데 하루키는 어떻게 이런 글을 '수필집'이란 이름으로 출판할 생각을 했을까? 하루키 스스로는 일기를 안 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하루치 일기에 가까운 글들이고, 그가 블로그를 운영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페이지 분량의 블로깅에 해당하는 '잡문'들이니 말이다. 딱히 수필이라 부를만한 특정한 주제, 소재,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 하고자 하는 '목적'은 없는 그의 글은 나의 글이 그렇듯 누가 봐도 '잡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잡雜'이라는 표현은 비하의  의미보다는 여러 가지가 섞여있다는 사전적 본연의 말임에 오해 없길 바란다.

늘 그렇지만 그의 글에서 어떤 교훈이나 영감을 얻으려 했다면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작가는 확실히 아니다. 하지만 행간에서 묻어나는 그의 자유로운 사고와 참신한 문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노력들을 배울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으로.

절반쯤 남았던 그 책을 모두 읽었는데도 아직도 레슨이 끝나려면 아직 20분 정도가 더 남았다.

이제는 찬바람이 스산한 압구정동 대로변을 패닝 하면서 스치는 시선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보기로 한다.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들의 검은빛 투성이의 옷차림 사이사이로 보이는 미니스톱 편의점 주인아저씨. 재고 조사 중이신가? 아르바이트 학생 하나 없이 무척 분주하다.

일찍 문 닫은 손바느질 맞춤 양복점을 하나 건너뛰어서  그 옆 파파존스 피자가게. 그 안에 무슨 사연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지 모를 러시아계 외국인 일가족-그들이 모두 앉기에는 좁아 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식사를 거의 다 마쳤는지 빈 종이 상자와 큼직한 환타병과 내용모를 대화들만 보인다.  

붉은 벽돌 벽 하나를 사이로 제법 질서 있게 늘어선 피자 배달 오토바이. 마침 그 오토바이의 사용자일 배달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골목 쪽으로 난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이번엔 배달은 아니다.

화단에 멋스럽게 기대 있는 흰 털모자의 여자 친구에게 다가간다. 여자의 코 위에 올려진 검은 뿔테 안경도 그저 멋으로 쓴 것일 테지. 조명도 제대로 없는 골목 귀퉁이에서 함께 나누고 헤어지는 어색한 짧은 맞담배질-입맞춤이 아닌 게 아쉽다. 그들이 만들어낸 늘어진 담배 연기가 검은 골목길에 묘한 대조를 이루며 흩어진다.



패닝은 여기서 끝. 그 옆으로 주차된 외제 차량들이나 문 닫은 상가의 순서를 열거하기엔 너무 재미없으니깐.

나도 누군가에게는 횡단보도를 절반쯤 가린 불법 주차하고는 자동차 실내등에 의지해 궁색하게 책을 보거나 밖을 힐끔거리는 이상한 사내정도로 관찰되겠지. 어찌 보면 나 스스로가 우물 위를 올려다보는 개구리요 울타리 안의 네 발 짐승이다.

재미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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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0.17.

 

하루키의 소설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아침에 출근해 별다른 수정 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가긴엔 다소 긴 글들을 자주 블로깅했던 시기의 글이다. 딱 15년 전 요즘이다.

 

다행히 아이의 첼로를 향한 도전은 길지 않아 압구정동으로 밤 외출은 오래지 않았다. 그 후로 피아노로, 또 그 후론 연극연출로 아이의 선호가 바뀔 때마다 무언가 다른 부모로서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다 그만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글로 박제된 2009년의 가을밤 압구정동의 풍경은 여전히 나를 그곳으로 되돌려 주는 비밀의 문이 되어 남아있다. 오래된 사진 위의 그때는 젊었던-당시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내 얼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삐 살아온 몇십 년은 통째로 기억이 소실된 것 같은데 그 사이 이렇게 이정표를 세워 놓듯 무심히 깔아놓은 글들이 당시를 통과해 오늘에 살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노벨문학상의 글도 소중하지만 이제 보니 내가 써 내려갔던 나의 생각이 출력되어 활자화된 내 글이 사뭇 소중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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