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인 일정대로 살아가는 걸 즐기는 나 같은 극소심 A형들에겐 뭐든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는 건 꽤나 짜증스러운 일이다. 가급적 하루를 미리 계획해 놓은 일정대로 살아야 하고, 밥도 미리 정해진 사람이랑 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늘 계획된 시간에 가야 후련하다. 화장실은 늘 후련하긴 하지만^^
힘들고 불편스러운 일인데도 계획에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꾸역꾸역 해내는 스스로가 어느 땐 대견하기까지 할 정도다. 가끔 나의 게으름 때문에 '계획'을 어길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둘러 찾아온 겨울 날씨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사이에 안면을 바꾸고 곤두박질한 수은주와 심술궂은 바람은 때 아닌 겨울 외투를 꺼내게 하고 채 노란 잎을 뽐내지 못한 은행나무를 알몸으로 만든다.
오늘은 12월이나 되어야 어울릴 것 같은-역시 계획에 없던- 털까지 달린 카키색 빈폴 겨울 외투에 장갑까지 챙겨서 집을 나섰다. 팔자에 없는 역삼동 특급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가 포함된 일정을 위해 보통 때 보다 30분 정도 일찍 서두른 것이다.
약수역과 교대역. 두 번의 지하철 갈아타야 한다. 통근 구간 외에는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늘 환승 연결 통로가 지하철의 앞부분일까 뒷부분일까를 놓고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지만 번번이 틀리기 일쑤다. 제법 확신을 갖고 지하철 맨 앞 칸을 선택했는데 정작 환승 계단은 맨 뒤였을 때 맛보는 낭패감이란! 스스로의 '예지력'에 자신이 없을땐 아예 중간쯤-4번이나 5번 객차-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중용'의 덕이랄까?
그러고 보면 무슨 일이든 '중간'에 서게 되면 여러모로 이로운 점이 많다.
매도 처음에 맞는 것이 낫다지만 그건 틀림없이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다. 요새도 그런 '줄빠따'를 치는 곳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참 독毒이 오른 사람이 휘두르는 '첫 빠따'의 몽둥이는 늘 전체 몽둥이질의 상위 10% 안에 드는 것이다. 그러다 중간쯤 점차 힘이 빠졌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마치 '유종의 미'라도 거두려는 것인지 다시 힘을 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중간에 맞는 게 낫다.ㅋ
또한 처음이나 맨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필요 이상의 '주의 집중'을 받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뭐 권투 오픈 경기 선수도 아니고 무대를 마무리할 조용필도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중간이라면 뭔가를 처음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프런티어 정신'도, 맨 뒷사람에게 의례히 붙는 '낙오자'의 이미지도 없다. 어찌 보면 앞선 사람을 칭찬해 주고 뒷사람을 격려해 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최하층 빈민에게 주는 '생활 구호'의 혜택은 없겠지만 최상위 고소득자에게 부과되는 각종 '누진세'도 없는, '중산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늘 중간에 있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다.
사실, 아둥바둥 맨 앞에 서려는 욕심만 조금 버리면 많이 홀가분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지금은 중간에 있지만 점점 더 뒤로 처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님 맨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느끼는 '열등감' 때문일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오늘도 '중간만 가라'는 자조적 기원을 한다.
역시 난 B급 인생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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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1.1.
이 블로그 공지사항('Who's Aladdin? 알라딘?')의 글 중에도 언급했지만 정말 딱 '이 땅의 평균을 지향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각했다.
평범한 외모, 평범한 키, 평범한 학력, 평범한 회사, 평범한 재력, 평범한 건강......
하지만 인생의 중반을 돌고 난 시점에서 뛰어왔던 자리를 뒤돌아보면, 혹은 남들로부터 받는 평가를 근거로, 그것도 아님 신문지상에 통계로 나오는 연봉순위 같은 것으로 자리매김하면 나의 생각과 달리 늘 상위권에 점이 찍혀있다. 내가 누리는 평범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부러움과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데 한편으론 '난 아무것도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역시나 사람은 상대적 기준의 동물이다.
자로 재듯 정규분포로 사람들이 흩어져 사는 것도 아닐 테고 '평균의 오류'가 얼마나 클지를 생각하면 평균의 지향은 부질없는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평균이 평범을 가져올 것이란 생각도 너무 나이브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 목표를 '평균보다 조금 나은 삶'으로 바꿔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분지족 安分知足. 제 분수를 알고 만족하는 삶.
세상의 평균이 아니라 '내 욕심의 평균'을 지향하는 게 평범한 삶 아닐지?
문제는 내가 수학을 잘 못해 평균을 잘 못 구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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