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화장실에서 앞 손님(?)이 버리고 간 화장실에 어울리는 '조선일보'를 주워 쭈욱 열독을 했다.
보통은 발 빠른 청소 아주머니 덕에 화장실에 신문이 남아나지 않는데 오늘은 횡재수가 있다. 느긋하게 앉아 오래간만에 종이 신문을 본 셈이다. 매주 연재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 시대 클래식 애호가'라는 칼럼이 눈에 얼른 들어온다. 조선일보 제법인데?
안동림 교수, 풍월당의 박종호 선생에 이어 아마 이 번이 세 번째 순서인것 같다. 김갑수 씨가 주인공이다.
흔하디 흔한 이름 덕에 예전부터 알던 사람 같지만 개인적으론 생경한 인물.
시인이자 문화비평가. 음반 3만장과 스피커 14조, 턴테이블 4대, 셀 수 없는 앰프들...... 이런 보물들과 함께 자신만의 작업실인 '줄라이 홀'을 갖고 있다는 부러운 양반이다.
"남들 다 하는 주택부금 하지 않고, 자동차 면허도 없어요. 보험·저축·부동산은 여력도 없고요."
남들이 다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디오만을 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특이한, 그래서 매력적인 사람.
기사 말미에 바로 자신의 작업실 이야기며, 음악과 오디오 이야기를 풀어놓은 <지구 위의 작업실>이라는 책을 얼마 전 냈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바로 서점으로 내려갔다. (회사 지하에 대형 서점이 입주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개인 작업실이야기, 커피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음악이야기.
정말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적잖은 대리만족을 경험하게하는 이 책에 많은 오디오파일과 은둔자-혹은 은둔 희망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이 예상된다.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에 속해 있으나 날마다 현실을 멀리멀리 떠나는 사람의 생활 보고서'라고 스스로 정의한 이 책을 음악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책으로 소개한다.
음악을 들으며 가끔 읽을만한 책이 없어 아쉬울 때가 있다. 서재에 그득한 것이 역시 책들이지만 주로 경영/경제 서적들이라 정작 음악과 어울리는 책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만날 오디오 잡지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맛깔난 글 솜씨가 맘에 들어 작가명 검색으로 그의 또 다른 수필집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를 같이 사들고 올라왔다.
평생을 어떤 사회단체에도 가입해 본 적이 없다는 김갑수 씨의 유별한 개인주의적 일상들에 대목마다 부러움이 스물 거리며 일어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이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런 모습을 하나 둘 흘려가며 관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려는 '노출증' 역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소개하는 이 책 역시 노출증의 발로이다.
결론적으로 '뽐뿌'는 제대로임을 인정한다. 나도 음악과 커피가 있는 나만의 개인 작업실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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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6.12.
성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시인이자 오디오매니아.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본문에 소개한 책 두 권이 내가 갖은것 전부라 그가 무슨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2살 위인 배우 김갑수와 한자까지 동일하게 쓰는 터라 인터넷 검색엔 죄다 '배우' 김갑수만 나오던 시절이었다. 읽는 내내 재미있는 글솜씨라 그저 나와 맥이 통하는 오디오파일 중의 잡문가형 언더그라운드 문필가로 알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방송-주로 종편-에 자주 얼굴을 보였다. 그것도 정치평론 뭐 그런 류다. 미학석사가 뜬금없는 독일 언어철학박사과정에 뛰어들었다 때려치우고 정치논객이 된 진중권과 비슷하다. 그저 편안한 글 쓰는 오디오쟁이 동네 아저씨로 알 때가 좋았는데 막상 빈번하게 여기저기 얼굴이 나오다 보니 나와 정치성향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시큰둥했졌다.
나만 알던 맛집이 털려 이젠 아무나 줄을 서 먹는 그저 그런 집이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로 작년 다시 문을 연 팔당의 <봉주르>가 있다.
25년 전쯤 처음 봉주르를 드나들 때까지만 해도 그리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간판도 변변치 않은 비포장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황토 초가 여러 채를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제법 토속적 느낌에 닭장도 있었고 마당에선 한겨울 불멍이 가능한 장작화로도 있었다. 항아리수제비는 지금 생각해도 맛있었다. 그러던 것이 갈 때마다 규모가 커지고 기업화된다 싶더니 주말이면 차가 줄을 서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나만 알던 곳이 알려진 '대중' 음식점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초 허가받은 24㎡가 아닌 5천300㎡로 불법점유 영업 중이란 것이 알려졌을 때는 이상한 분노까지 치밀어 차라리 망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영업정지와 경매로 넘어가 지금의 새 주인에 이르렀다)
뭐 매일 방송에 나가는 것은 아닐 테니 여전히 커피콩을 볶으며 음악을 듣는 오디오파일 아저씨겠지만 이젠 '정치평론가' 김갑수로도 검색이 되는 걸 봐선 더 이상 나만이 아는 맛집은 아닌 게 됐다.
하긴.
그 많은 오디오와 자신만의 지하실을 유지하려면 돈 나오는 주머니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테니 이해해야 하는데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그가 공연히 마뜩잖다.
'현실 세계에 속해 있으나 날마다 현실을 멀리멀리 떠나는 사람'으로 정의한 그의 정체성에서의 변화가 뭔가 아쉬운 커밍아웃으로 보였나 보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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