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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오늘

[2009.8.9.] 그냥 지켜봐 주기

by 오늘의 알라딘 2024. 7. 22.

'울고 싶을 때 뺨 때린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터질 감정의 표현이었는데 누군가가 대신 도화선의 역할을 해준 경우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뺨 때리는 일을 조금 참았다면 어땠을까? 울고 싶었던 그 친구는 굳이 다른 이유를 찾아서라도 결국은 울었을까? 아님 우리네 일상이 그렇듯 속으로 삭이고 삭이다 그저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감정의 기억으로 남겼을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어차피 울어 버렸을 수도 아님 참아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울거나 말 결정은 본인이 하게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일에 너무 쉽게 관여한다. 그것이 뺨을 때리는 일이든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든.

어차피 울어버리거나 아님 모두가 즐거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당사자의 정리된 감정 이후에야 남들의 개입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데 원치 않는 유산을 밥 먹듯 하는 임산부에게는 새로운 임신 소식이 남들에게는 조금 후에 알려졌으면 하는 일일 수 있다.


한 박자 늦게 아는 척 한다고 그 기쁨이 사라지거나 반감하는 것이 아닌데 가끔 나만의 감정에만 너무 충실하다.

솔직함과 직선적인 것이 대부분 미덕인 경우가 많고, 문제 해결에 좋은 지름길일 때가 있다.

하지만 무슨 수학 숙제도 아닌데 우린 너무 서두르고 자신의 '인지 사실'의 진위를 확인하는데만 몰두한다. 게다가 당사자들이 부인이라도 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이중성을 비난하기 까지 한다. 

그냥 지켜봐주는 것.
멀리서 마음으로 응원해 주는 것.

조금 늦게 아는 척 해주는 마음의 배려가 아쉽다. 그것이 설사 남들도 다 알아버린 제일 나중이라도 별 상관 없을텐데.
時報를 알려주듯 우리의 삶이 늘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정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모.

 
하지만, 그토록 '직선적'인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왜 남들이 지적해 주는 그 '직선적인 것'은 인정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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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7.22.
 
일기처럼 글을 쓰긴 하는데 이게 나만 보는게 아니다보니 나 아닌 주인공이 있는 경우 그 사람에게 혹시 모를 피해라도 있을까봐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실명이 빠지다 보니 나중에 보면 무슨 이유로 저런 글을 썼을까 갸우뚱해 진다.
 
본문의 글도 15년이 지난 지금 읽어보니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나본데 무엇때문에 시작된 글일지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다.
 
읽어보니 결론은, 남에게 대한 아는 척은 좀 늦게, 나에 대한 지적은 조금 더 쿨하게 받자'는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빠르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민족성 탓에 가끔 우를 범한다. 빠르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사실 서로 반대말에 가깝다. 바쁘면 분명할 수가 없고 분명할려면 신중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린 늘 작은 실마리로 결론을 내고 그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크다. 아니 확신을 받기 위해 여러군데 말을 옮기고 동의하는 사람을 늘려간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좋은말로 에두를 때는 의사결정이 빠르다 포장이 되지만 늘 경솔한 판단과 예단이 붙기 마련이다.
 
이선균이 그렇게 갔다. 결론은 달라질게 없었더라도 수사기록의 섣부른 노출과 언론의 '확신에 찬' 입방아에 대중의 들불같은 '빠른' 판단이 더 해지지 않았더라면 혹시 그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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