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문고 옆 미국 대사관을 뱀이 꽈리를 틀어 에워싸듯 줄지어 선 수많은 비자 인터뷰 대기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유학이거나 취업, 이민, 관광, 사업 등등-돈을 쓰러 미국에 가겠다는 사람이 저리 많은 것에 놀랐을 것이며 '저렇게까지 하면서 꼭 미국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 역시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오늘 내가 그 한심스러운(?) 대열에 서게 되었다. 9월에 있을 콘퍼런스 때문에 미국 비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빠듯한 일정 탓에 오늘 아침 8시로 인터뷰 일정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넉넉한 시간을 갖고 집을 나섰는데, 아침 7시 10분에 도착한 미국 대사관엔 이미 100여 명 이상의 줄로 둘러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할 차양막이 있는 곳에서 줄을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뭐가 불만인지 유리로 가림막이 된 부스 안의 여자 영사는 표정이 영 신경질적이다. 말이 안 통하는지 통역까지 불러다가 긴 시간 앞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더니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쫄리는 건 뭔지.ㅠ
꼼꼼히 준비한 탓에 서류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실제 인터뷰는 채 30초도 안 걸렸다. 순서 바로 앞사람들마다 시비를 걸던 여자 영사관은 내겐 유독 관대히 별 질문도, 시비도 없이-심지어 웃으며-순순히 비자 승인 스탬프를 누른다. 준비해 간 서류를 넘겨보지도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부스 안에서 도와주는 여직원이 서류 중 골라 건네준 재직증명서와 소득증명원을 겨우 힐끔 보고서는 "삼성**에 얼마나 근무했느냐?", "직위는 뭐냐?", "콘퍼런스는 처음 참석이냐?", "며칠 일정이냐?" 같은 통역을 낄 필요도 없는 단답형 질문 4개가 전부였다.
앞 순서의 사람마다 5분이상씩 딴지를 걸던 영사의 질문들로써는 대단히 파격적이다. 아마도 삼성이라는 회사이름과 미국에 눌러앉진 않을 사람이라는 소득증명이 영사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내내 귀찮은 일거리 하나를 덜어내어 마음이 편해진 반면, 그 아침부터 치사한 비자 인터뷰를 위해 지문을 날인해 가며 호들갑을 떤 그 많은 사람들-나를 포함한-과 철저히 돈의 논리로 비자를 발급하는 미국인들을 생각하면 괜스레 불쾌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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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11.20
저때 발급받은 10년짜리 비자도 오래전 만료되었으니 미국가기 쉽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그사이 하와이를 포함해 미국 방문기회가 제법 있어 대여섯 번 사증을 사용했고, 괌/사이판 같은 미국령 방문에도 남들보다 편히 다녔다. 지금은 ESTA가 생겨서 굳이 비자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유학이나 상용비자 정도나 저리 운영하겠지.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한번 비자 인터뷰에 떨어지면 이후로는 아예 미국 출입은 어렵다고 봐야 할 만큼 지랄 맞은 절차였다. 선진국에 방문하고자 하는 후진국 국민들에 대한 선별(?) 작업. 특히 근무지나 보증이 번듯하지 못한 미혼의 젊은 여성은 미국 비자 통과가 에이투뿔 소고기 등급을 맞는 것 만큼 힘들다 보니 옷은 어떤 거 입고 가라 화장은 어찌해라 같은 비법(?)이 난무하기도 한 웃지 못할 시절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젠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었다. 라고 믿고 싶다.
무비자 입국가능한 나라수를 의미하는 여권파워는 늘 2~3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거꾸로 이제는 많은 나라의 방문객들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일반 여권만으로도 우리나라에 무비자 관광/방문할 수 있는 나라도 110개국이 넘는다. 사람을 가려 받아야 할 일이 있겠지만 더 이상 틀어막는 게 능사가 아닌 세상이다.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 서랍 속에 봉인된 내 여권엔 언제 콧바람이 들어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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