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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딸, 하나님의 은혜에게

[2006.7.14] 스피커, 테러 당하다.

by 오늘의 알라딘 2023. 11. 27.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간 앰프와 케이블의 교체 후 정말 당분간은 바꿈질이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로 맘에 드는 소리를 내주던 스피커였는데 뭔가 찜찜하여-정말 우연히-트위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허걱. 왼쪽 트위터는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콕콕 찍어 놓은 흔적이 있고, 오른쪽은 아이예 손가락으로 푹 눌려져 있다. 이 상태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눌린 트위터를 본 순간부터 이상스럽게 고음부의 잡음이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게 된다.

누가 이런 만행을? 

딸아이? 아닐 것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부모가 하지 말라면 안 하는 아이였다. 흰 벽지의 아파트에 내내 살았어도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꼬맹이 시절부터 벽에 낙서 한 번을 한 적이 없는 아이였다. 게다가 그동안 몇 차례 스피커를 바꾸는 동안 여러 번 트위터의 돔을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열 살이나 먹어서 아빠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물건인지는 충분히 알 나이도 되었으니 말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심증도 약한 상태에서 자는 아이를 깨워 따질 수도 없다. 

아내는 아니란다.-아닐 것이다.  요새 다른 일로 정신이 없을 상태이니 이런 트위터에 호기심을 부릴 여유는 없을 것이다.

아, 그럼 누구인가?ㅠ  집의 푸들 강아지가 뛰어오르기엔 너무 높고 정교한 만행이라 이 역시 아닐 것이고, 가끔 아이를 보러 들르시는 장모님에 심증을 갖는 것 역시 여러 정황상 부적절하다.

얼른 생각나는 범행(?) 대상자로는 지난 7월 10일. 아이의 생일잔치에 놀러 와서 영화 한 편을 보고 돌아간 딸아이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중 유독 이 것 저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한 아이가 있어서 더욱 심증이 간다.  그 아이가 맞다면 아마 같이 있었던 딸아이는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낼 물어봐야지.

땀을 삐질 대며 트위터를 분리했다.  스캔스픽을 자회사로 두고 있는 Vifa사의 D25AG-05-06 모델이다.

 

알루미늄 돔이 채용된 트위터 유닛을 분리했다.  그대로 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간의 육각 나사 세 개를 더 풀고 분해 수준으로 전면 패널을 떼어내니 겨우 알루미늄 돔을 들어낼 수 있다.  이제는 손쉽게 눌린 돔 부위를 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눌렸던 돔에는 자국이 남아서 이건 없앨 수 없다.  가슴이 아프다.  아니라 하는 사람도 많지만 진동체 역할을 하는 트위터 돔이 변형되었는데 소리에 이상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가까이 귀를 대고 들으면 고음부 잡음이 분명 커진 것 같다.-환청.

이튿날. 퇴근하자마자 아이에게 물었다.  "이거 누가 이랬어?"
거짓말을 하면 더 크게 혼난 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님 적어도 아빠는 이 정도를 가지고 야단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 너무 당당하고 맹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너무 기가 막히면 화도 낼 수도 큰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아빠가 아끼는 물건이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다짐을 받고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딸아이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결국 사건 현장엔 몸만 버린 스피커와 그걸 지켜보는 나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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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11.27.

 

공교롭게도 오늘은 예전에 써 놓았던 오디오 관련 글들이 많이 보여 여럿 옮긴다. 하지만 이 글은 딸아이가 주인공이라 다른 카테고리에 올린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 준다고 했던가?  가뜩이라 중국산 짭이라는 추노마크 때문에 곱게 보이질 않은 스피커였는데 딸아이의 테러가 결국 나와의 인연을 조기에 끊는 계기가 된다.

 

자식이 잘못을 고백하는 순간 부모에게는 모든 죄가 사해진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정작 부모가 피해자라고 한들 고백을 듣는 순간부턴 변호인이 되는 게 이치이다. 그게 성경적이고 그러니 부모다.

 

타고난 품성이 그런 것이겠지만 이후 아이가 크고 그의 진로와 방향성을 놓고 언성을 높인 적은 있어도 누가 누구에게 고백할 만한 잘못을 한 적 없이 성인이 되었다. 룰과 규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하는 대쪽 같은 심성이 때론 답답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지켜낸 딸아이에게 영원한 변호인으로서 박수를 보낸다.

훗날 다른 스피커에 동일한 테러를 한번 더 당했다. 그때의 범인은 지인의 아들이었으며 어이없게도 바로 내 눈앞에서 시퍼렇게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발생했다. 애써 웃었지만 (맘으로는) 용서하지 않았다. 내 자식이 아니라서. ㅎ

 

하지만 두 번 모두,

덕분에 스피커 잘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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