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프게니 코롤리오프(Evgeni koroliov).
이름만 들어도 러시아 사람인 것은 눈치가 서겠지만 잘 모르는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나만 잘 몰랐나 보다. 타체트, 헨슬러 등 그리 유명하지 않은 레이블에서 나온 그의 앞선 바흐의 앨범들이 적잖게 회자되며 칭찬하기에 인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 번엔 Profil 레이블을 통해 헨델의 피아노 조곡을 선보인다.
바흐에 이어서 바로크 시대의 태두인 헨델의 피아노 모음곡들을 통해 이미 절정의 원숙미를 과시하듯 편안하게, 때로는 바로크의 명징하고 단순함으로 연주하고 있다.
특히 익숙한 멜로디의 모음곡 4번의 '사라방드(Saraband)'-정확한 표준어 표기법은 '사라반드'라고 하는데 불편해서 못 쓰겠다-의 경우 1분 남짓의 짧은 연주시간이 도저히 아쉬울 정도이다.
올 해로 환갑(1949년생)이 되는 노년의 명연주자를 이제서라도 발견하게 된 것이 다행이자 아쉬움이다.
특이한 것은 그가 연주하는 Steinway피아노의 음색은 아무리 들어보아도 바로크 시대의 고악기와 흡사하다.
헨델이나 바흐 당시에는 '피아노 에 포르테(piano e forte)'가 막 등장해서 별로 환대받지 못했을 시기이니, 보나 마나 쳄발로(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 같은 지금은 구경하기 힘든 고악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앨범에서의 피아노 음색은 음향기술 상의 조작(?) 일지 모르나 앞서 말한 고악기들을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하프를 두드리는 듯한 챔발로의 음색을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작곡가의 작곡 의도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은 감상이 필요하다.
* 추가 (2009.2.25) : 집에 가서 소너스 파베르의 크레모나로 듣는 그의 피아노는 사무실에서 처럼 강한 고악기의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조악한 PC사운드와 이어폰 때문에 피아노 음색이 챔발로와 가깝게 들렸던 것 같다. 그래도 원래 본문의 느낌이 유효하므로 본문을 수정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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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3.22.
예프게니 코롤리오프.
맞다. 나만 몰랐던 연주자.
본문에 살짝 언급된 대로 그는 사실 바흐 스페셜리스트다. 푸가의 기법(The Art of Fugue)을 포함해 그의 수많은 바흐 명반들이 즐비한데도 첫 번째 만난 앨범이 헨델이라니 어지간히 운이 없는 경우였다. 뭐 그렇다고 헨델 연주가 안 좋았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에도 여러 페스티벌에서 초청되어 연주했을 때마다 늘 레퍼토리는 바흐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바흐와 헨델은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라 부를 정도로 바로크 음악의 양대기둥이지만 1685년 독일에서 태어난 동갑내기였던 것 치고는 그 삶의 궤적과 음악이 정 반대를 향해 나란히 서 있다.
바흐는 대대로 음악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을 떠난 적 없이 두 명의 부인에게서 20명의 자식을 두고 살았다. 궁정과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대위법의 푸가와 같이 엄숙 장엄한 곡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헨델은 집안에 음악가라곤 하나도 없는 외과의사이자 이발사-당시 외과의사들은 다들 이발사였다-의 늦둥이로 태어나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고 영국을 주무대로 활동하다 국적까지 영국으로 바꾼 일종의 해외파(?)였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심지어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음악 역시 초기 왕실음악을 제외하곤 줄곧 대위법보다는 화성을 통해 대중에게 보다 친근할 음악에 매진했다.
일부러 엇나가려 해도 동시대를 이렇게 정반대로 살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시 딴따라(?) 음악인 오페라 곡을 쓰는데 헨델이 집중한 반면 바흐는 단 한 곡도 쓰지 않았다. 서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동갑내기였으면서도 실제로는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다.
그러니 바흐 전문가인 예프게니 코롤리오프가 헨델을 굳이 연주한 것을 보면 그도 가끔은 엇나가고 싶었던 날이 있었나 보다.
누구든 삐뚤어지고 싶은 날이 있어서 평평한 날들이 더 곧아 보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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