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디오 산업이라는 것이 꼭 '규모의 경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파이 같은 마니아를 대상으로 한 시장의 경우 오히려 대형 공장형 생산 시스템이 품질의 유지나 재고 관리에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서구 유수의 오디오 시스템이나 스피커 메이커의 경우에도 소규모 가내 수공업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설계나 디자인만 담당하고 정작 생산은 대륙에서 해오는 경우도 많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다. 스피커계의 B&W나 앰프나 소스계의 마란츠 같은 대형 업체의 공장형 대량 생산 체계가 아니었다면 이 가격에 지금과 동일한 품질을 즐기긴 여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 규모가 대형으로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조립 과정을 일일이 수작업에 의존하는 '공방'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업체가 상당수라 자동차 산업의 컨베이어 시스템 같은 것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다. 오로지 장인의 '손과 귀'로 튜닝되어 생산되는 그 '음악의 도구'들은 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을 능가하는 완성도와 음악적 고품위 덕택에 여전히 많은 오디오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너스파베르의 아마티 생산 과정을 보았는가? 골드문트의 앰프 라인을 보았는가? 가끔 이런 '장인정신'에 기초한 오디오 업계의 명가들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반추해 본다. 우리 역시 대기업형 오디오 업체는 전무하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태광, 인켈, 롯데 등등 추억 속의 아련한 '전축' 업체가 시장에서 동면에 든 지 오래다. 그나마 에이프릴뮤직을 필두로 AIsound, 소닉크래프트, 사운드포럼 등이 종합 오디오 메이커로서 명맥을 잇고 있는 형편이고 몇몇 진공관 앰프 전문 기업과 스피커 메이커들이 세상에 나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들 국내 기업들의 영세함을 안타까워하는 말이 아님을 다시 밝힌다. -'장인정신'이 가득한 영세함이라면 얼마든지 시장의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국내 업체 몇 군데의 예를 들어보자.
나와는 별 인연이 없어 한 가지 제품도 사용해본 적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애정을 갖고 있는 에이프릴 뮤직이 오랜 기간 준비한 신형 앰프가 얼마 전 출시되었다. 하지만 바로 일부 리콜이 되었고 그보다 며칠 전에는 과거에 출시된 기기에 사용된 기판의 조악함을 이유로 교체가 진행되기도 했다. 다행히 에이프릴이 건전한 기업관을 갖고 있는 회사의 경우라 이런 리콜이라도 실시하는 것이지만, 크고 작은 오류와 개선 작업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 '완성도'에 안타까움이 있다.
또 한 회사. 예전 블로그를 뒤져보면 알겠지만 불과 몇 달 전에 소닉크래프트에서 새로 출시한 파워 앰프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요새 젊은 애들 말로 '엣지'있는 외양과 힘이 넘치는 구동력의 앰프에 딸려온 '매뉴얼'이 있었다. 구버전의 매뉴얼에 사진 몇 장 바뀌어 편집한 내용을 성의 없게 '복사'해서 문방구에서 파는 클리어 파일에 끼워 넣어진 그것을 보면서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과연 어느 외국산 앰프가 이랬을까?
그리고 또 한 회사. 진공관 앰프로는 국내 선두라 인정해 줄 만한 Tone의 신형 앰프들을 연이어 들였다.
먼저 들어 왔던 'Ti-200'의 경우 본체 커버 도장의 질이 좋지 못해 열을 받으면 받을수록 흉측하게 도열한 상처들이 보였다. 결국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최상위 기종이라는 '판테온 Mk3'으로 교체되었는데 그 멋진 디자인에 비해 헤어라인 처리가 거칠어서 트랜스 부위에 마치 무엇인가로 찍힌 것 같은 표시들이 여럿이다. 새시에만 대 당 몇 백만 원이 들었다고 했던 업체의 말이 생각나니 더 황망했다. 또한 내부 포장재로 사용한 '고급'의 붉은 융 역시 어디서 한 참을 굴렀는지 기름때가 많다. - 내가 어디 전시품이나 중고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ㅠ,ㅠ 게다가 판테온 역시 매뉴얼은 아이예 없었다. 세계 어느 기종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디자인과 성능에 비해 이런 사소한 것에 그토록 '무신경'할 수 있는 호연지기에 역시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과연 어느 외국산 앰프가 이랬을까?
끝으로 또 한 회사. 금잔디 칼라스의 역시 최상위 기종이라는 '아틀란티스' 스피커를 들였다.
나름 안하던 시청도 직접 해보고 내 인생 마지막 스피커라는 비장한 의미를 부여한 스피커를 받았는데, 매뉴얼? 역시 없다. 우리나라 제품은 매뉴얼에 공을 들이면 누가 잡아가는지 죄다 별 관심이 없다. 까짓 스피커에 매뉴얼이 무슨 소용이람? 넘어가자, 하지만 설치하고 나서 스피커를 쓰다듬어 보니 한쪽 표면이 거칠다. 사장님은 도료의 도장이 날려서 그런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A4용지를 이용한 마감(?) 비법을 전수해 주신다. 아! 포장하기 전에 이런 마감 상태도 미리 확인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긴 한쪽 스피커에는 칼라스 마크도 붙어 있지 않아서 따로 방문해 받아다가 직접 붙였으니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소리만 잘 나면 되는 거지모. 넘어가자. 그냥 이랬었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으니.
그러다 스피커 구입 후 2주일이 지나서야 스피커 유닛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첫 대면에 참 오래도 쑥스러워한 셈이지. 아틀란티스에는 좌우 총 10개의 유닛이 들어간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열 개 가운데 정확히 가운데 박혀있는 놈이 몇 안된다. 어느 놈은 왼쪽으로 어느 놈은 오른쪽으로 또 어느 놈은 위로 아래로 치우쳐 있다.
그냥 위치만 틀어진 것은 역시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으니' 상관 없겠는데, 우퍼의 경우 고무 에지를 전면 배플이 한쪽을 살짝 누르고 있는 상태라 이건 도저히 음질에 이상이 없다고 볼 수 없었다. 에지가 무엇인가? 결국 페이퍼 콘을 탄력 있고 균형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스프링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일 터인데 이게 항시 조금 눌려있다는 것은 극소심 A형인 내 경우 웃어넘기기 어려운 사실이다.
밤 새(?) 고민하다-사실이다-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금잔디에 문의 글을 올렸다. 기대에 어긋남 없이 사장님의 답변이 바로 올라왔다. 답변의 요지는 '소량생산으로 인한 조립상의 한계로 인한 오차범위 내의 편차이며 소리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
저것이 '오차 범위' 내라? 허용 오차를 과연 어느 정도의 관용도로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조금 의외다. 소리와는 정말 큰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리에 미쳐서 휴즈 하나라도 바꿔보려고 안달을 하는 오됴파일에게는 주둥이가 삐뚤게 붙은 스피커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저 무거운 녀석을 냉큼 들어다가 그나마 양호한 넘으로 교환을 해준다던가 하는 기대까지는 역시 않았다. 하지만 과연 어느 외국산 스피커가 이랬을까? 유닛의 중앙 정렬도 어려워하는 그것을. 그것도 스스로 '플래그쉽'이라고 명한 기기에 대한 변론으론 너무 '궁'한 것이었다.
적어도 튜닝의 귀재로 부터 다른 것도 아니고 우퍼 에지의 간섭에 대한 '음향적 판단'을 기대한 것이었는데, 소리와는 무관한 조립상의 편차로 인한 미관상의 문제로 단정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올 해는 국산 오디오의 선전이 대견한 한 해였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업그레이드 버전을 통한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라인업 구성으로 만족할 시기는 지났다 생각한다. 한 두가지만이라도 '완성도' 있는 제품으로 꾸준한 명성을 내어보는 명예를 건 '장인 정신'이 아쉽다. 그도 어렵다면 '상인 정신'이라도.
2%에 늘 목마른 국산 오디오 사용자는 오늘도 아슬한 외줄을 탄다.
※ 추가(09.8.24) - 금잔디 칼라스 사장께서 방문하셔서 유닛 위치 교정을 해 주신다는 연락이 왔다. 윗글을 보고 연락하신 것은 아니고 전에 칼라스 게시판에 올린 질문에 내내 찜찜해하시다가 내게 쪽지를 주셨는데, 개봉을 않고 있으니 여기 블로그까지 찾아오셔서 덧글을 남기신 것이다. 처음부터 피차 이런 번거로움이 없어야 한다고 구시렁거린 것이 윗글의 '취지'였지만. 정말 다행인 것은 아직은 '기대'를 걸어 볼만한 국산 업체들인 탓에 이런 사후 A/S라도 가능한 것이다. 언급한 업체들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이후 조치 사항 역시 새로운 글을 통해 소개하겠다.
※ 추가(09.8.28) - 어제 금잔디 사장께서 집에 다녀가셨다. 위에 언급한 유닛의 중앙정열 불량(/)을 교정해 보려던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론 실패다. 조립상의 수정여지가 없어서 더 이상의 교정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쉽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 것만 이런 것인지 설계상의 한계로 모든 제품이 이 정도의 오차를 수용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제품의 개발에는 개선이 있기를 기대한다. 마감재와 유닛, 튜닝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기본적인 기대를 충족 못한다면 '하이엔드'라는 호칭은 걸맞지 않다. 핸들링이 좋다거나 빨리 달리는 차 모두를 명차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글 더하기]
오늘은 2024.8.1.
15년 전에 본문의 글을 써 놓고 몇 번 지울까 했었다. 오늘도 역시 다른 많은 글과 마찬가지로 이곳으로 옮기지 않고 삭제처리를 고심했다. 어차피 내 스피커가 된 마당에 흉을 늘어놓아보아야 제살 깎아먹기 같았다. 나중에 도리어 중고로 되팔거나 할 때 손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거실을 버티고 있는 걸 보면 기우였다.
일찍이 우리네 선조들도 데코와 포장, 디테일과 마무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란 속담을 남겼다. 가성비가 변하지 않는 물품구입의 진리겠지만 조금 더 비용을 들여서라도 명품이라 구분된 제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히 단가가 단순 소비재의 가격을 넘는 내구재나 부동산류의 가격은 가격이 결국 가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오디오 관련 제품들이 대부분 그런 쪽이다.
그러니 싼 것 여러 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애를 쓰기 마련인데 공동구매 공방 수준을 넘지 못하는 제작여건 때문에 국산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긴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15년이 지난 지금 국산 오디오 시장을 돌아본다. 어쩌면 이리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암울하다. 코로나의 영향을 넣어 생각해야겠지만 기존에 있던 메이커들도 철수하거나 규모를 줄인 경우가 많고 그나마 기술과 디자인 측면 모두 위에 언급한 '보기도 좋은 떡'에 해당했던 최애 W사도 최근 자금난으로 구매예약 취소분을 환불지연하는 등의 소식으로 카페가 뒤숭숭하기도 했다.
모두가 중고 돌려 막기에도 버거운 좁아터진 시장 탓이다. 정통 오디오 시장 성장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다 보니 기존 레거시 메이커조차 버티기 어려운 마당에 죄다 구멍가게에 불과한 국산 메이커들의 설 자리는 점점 소멸 중이다.
보기좋은 떡은 포기했다. 이젠 나만의 구성이 되어버린지도 모르는 국산 메이커들의 조합들이 더욱 유니크해질 그때까지 유지보수라도 가능할 정도의 숨이라도 붙어있길. 제발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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