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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오늘

[2009.11.21.] 건강검진의 계륵 대장내시경

by 오늘의 알라딘 2024. 11. 8.

나이가 들어 귀찮아지는 것 중에 하나가 해마다 한 번은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큰돈을 들여 진행하는 종합 검진이지만 의무적으로 차량 정기검사를 받아야 하는 '노후 차량'이 된 것 같아 개운한 뒷 맛은 아니다.

올해는 난생처음 '대장내시경'을 하기로 하고 '수면' 내시경을 신청했다. 위내시경과 함께하려면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검진 전날 공복 상태에서 위와 장을 완전히 비워내는 일이다. 대장정결제를 마시고 화장실을 몇 시간이나 들락거려야 하는 고역이다.

자동차 부동액을 담는 데 사용되면 딱 맞을 흰색의 대장정결제의 4리터짜리 통을 보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정수기에 대고 4리터의 물을 채우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걸 마시라고?  

 

200ml씩 10분마다 마셔야 한다는데 얼른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3시간 반'이 걸리는 일이다. 허걱. 맥주라면 모를까 물을 맨 정신에 4리터를 마시게 될 거라곤 당최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체액과 비슷하게 만들 요량이었는지 비릿한 소금물 맛이 목넘기기에 더 거북살스럽다.

미리 경험한 직장 동료들 중 백이면 백 모두 4리터는 도저히 다 못 마셨다고 한 일이다. 심지어 누구는 물 대신 '포카리스웨트'를 타서 먹으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야 다 마실 수 있다고. 혹시나 해서 병원에 전화해 보니 펄쩍 뛰며 절대 안 된단다. 반드시 물로만 채워서 마실 것! 

결국 타이머를 동원해 가며 따박따박 10분마다 원샷을 계속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건 참 잘한다. 계획 세워놓고 미련하게 단순 반복하는 일.ㅠ

 

저녁 7시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며 마시기 시작했는데 156페이지를 읽을 즈음에서 모두 마셨다. 저녁 10시 반.

임산부의 진통이 오는 시간처럼 처음에는 대장정결제를 마시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첫 번째 화장실에 갔는데 나중에는 책 두 페이지를 채 못 읽을 정도로 주기가 짧아졌다.

대장 내시경은 매년 할 필요는 없고 별 이상이 없는 경우 5년 정도에 한 번이면 된단다. 그나마 정말 다행한 일이다.

참고로 처음으로 '수면 내시경'이라는 것을 했는데 내 경우엔 수면이라기보다는 '마취'에 가까운 효과를 냈다. 위내시경용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것과 간호사가 포도당 수액에 '수면 유도제'를 주사하는 것까지는 본 것은 기억이 나는데 일어나 보니 모든 검사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정말 검사를 한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입이나 항문 모두 불편한 느낌 역시 일체 없었다. 깨어날 때 깊은 잠을 억지로 깨운 것 같은 어지러움이 조금 있었지만 이건 정말 최고다.

정작 검사 이후에 수면에서 깨어나서부터 맡겨놓은 안경을 찾아 쓰고 3층의 계단을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의 상황이 나중에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필름'이 끊긴 것을 빼면 매우 만족스럽다. 몇 해 전 '위 내시경'을 비수면으로 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불쾌함이랑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혹시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라면 반드시 수면 내시경을 강력 권한다. - 당연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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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4.11.8.

 

그 후로도 두 번 더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더 이상 저 4리터짜리 '부동액통'은 보지 못했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주는 콜프렙산 기준으로 대신 500ml 물통을 여러 번 마시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전체 마셔야 할 양도 3리터로 줄었다. 아마도 무식하게 생긴 4리터짜리 통을 앞에 두고 시작하자면 지레 겁부터 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래서 뭐든 적당한 포장과 크기 그럴싸한 외양이 필요한 거다. 같은 양을 먹게 해도 조금씩 나눠먹는 느낌이 들면 할만한데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작하면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먼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기 마련이니.

 

어젠 대통령이란 양반이 대국민 담화를 했는데 '사과한다'로 시작했다. 어떻게 서울대에 들어갔고 사시에 붙었는지 알 수 없을 그의 비논리적 언어구사력은 이미 익히 들은 바 있어 그러려니 하는데 정작 뭘 잘 못해서 사과했느냐는 질문에는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와이프가 시켜서 나왔다는 투다. 

 

아내는 가끔 사람들을 외모로, 얼굴로 평가하지 말라고 내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어제 목도한 대통령은 사과를 하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 어디 지방 나이트클럽에 보호비를 뜯어먹으러 나온 조폭 건달의 모습이었다. 품위와 신뢰, 신념을 확인할 웅변 따위는 차라리 78세 노인 트럼프 쪽에서 찾는 것이 빠르다.

 

다행인 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뿐이다.

겉모습이 때로는 실제를 많이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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